공간이 품어야 할 고요한 본질을 먼저 어루만지는 정원 디자이너, 이주은.

화려한 기교로 단숨에 시선을 빼앗기보다, 공간이 품어야 할 고요한 본질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사람. 정원의 생명력이 결국 시간을 견뎌내는 일임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사람. 매거진 그린이 마주한 첫 번째 대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굵직한 수식어들이 뒤따른다. 경기정원문화박람회를 시작으로 울산정원박람회, LH가든쇼 등 내로라하는 무대에서 연달아 대상을 거머쥐며 대중과 평단에 자신의 철학을 묵직하게 각인시켰다. ‘팀펄리가든’에서 디자이너로서 치열하게 보낸 10년의 세월을 거쳐, 이제는 법인 ‘공간이오’의 대표로서 정원 디자인의 새로운 궤적을 그리고 있는 그다. 공간의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식물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이주은 작가. 식물과 땅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지닌 그와 마주 앉아, 하나의 정원이 탄생하기까지의 깊고 다정한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그저 식물이 좋았던 소녀의 곁에는 늘 흙내음이 머물렀다. 시대가 요구하는 유망한 직업이었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길 바라셨던 아버지의 강경한 권유조차 식물을 향한 그의 단단한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원예학과에 진학해 꽃과 나무의 생리를 배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이내 그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인 갈증이 피어올랐다.

그 갈증은 그를 자연스럽게 조경 설계의 세계로 이끌었다. 대학원에서 조경을 전공하며 공간 디자인의 기본기와 원리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이후 독일에서 수학한 박사 출신 소장이 이끌던 조경설계사무소 ‘오이코스(Oikos)’에 입사해 실무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한남동, 성북동, 평창동 등 내로라하는 고급 주택들의 정원을 직접 발로 뛰며 눈에 담았던 경험은 그에게 ‘진짜 정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틔워준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과 나무라도, 결국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없다면 온전한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이주은, 정원 디자이너
실무를 익히며 뜨겁게 열정을 쏟던 그에게도 삶의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남편의 영국 유학,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육아라는 현실 앞에서 그는 도면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장장 12년이라는 긴 공백기. 누군가는 이를 뼈아픈 ‘경력 단절’이라 불렀겠지만, 영국의 낯선 풍경 속에서 아이를 키워내며 보낸 그 시간은 그에게 결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삶의 밀도를 채우는 고요한 겨울의 토양과도 같았다.
마흔이 훌쩍 넘어 다시 정원계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지인의 단호한 한마디였다. “너의 그 재능을 썩히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조언에 그는 다시 용기를 냈다. 하지만 곧바로 현장에 뛰어드는 대신, 그는 가장 묵묵하고 미련한 방식을 택했다.

“무작정 식물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주 똑같은 장소를 찾아가 사진을 찍었어요. 봄에 싹을 틔우던 식물이 여름의 폭우를 견디고, 가을에 색을 바꾸고, 겨울에 앙상해지는 그 모든 생육의 변화를 저만의 데이터로 축적한 겁니다.”
이렇게 쌓아 올린 방대한 계절별 식물 데이터는 이후 조경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살아있는 교재가 되었고, 현재 그가 디자인하는 정원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육아와 가사로 인해 일터를 떠나 불안해하는 많은 여성들과 후배들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정원을 다루는 일만큼은, 삶의 켜가 쌓이는 경험이 곧 막강한 자산이 됩니다. 식물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을 넘어, 계절을 겪어내고 삶을 돌보아 본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공간의 깊이가 분명히 있거든요.”
“마흔이 넘어도, 쉰이 넘어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원입니다.”
— 이주은


‘공간이오’를 이끄는 이주은 작가의 정원은 단순히 예쁜 식물을 나열해 두는 평면적인 전시장이 아니다. 그는 정원 상담을 할 때 “어떤 나무를 심어드릴까요?”라는 질문부터 던지는 법이 결코 없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는 언제나 단호하게 ‘기반 조성’을 강조한다.
“사람이 편안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동선을 내고, 언제든 물을 끌어 쓸 수 있게 수도를 연결하고, 집중호우가 쏟아질 때를 대비해 배수를 완벽하게 잡는 일. 이 모든 하부 구조가 갖춰지지 않은 땅에 아무리 비싼 나무를 심어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식재 배치에 있어서도 그의 건축적이고 공간적인 감수성은 빛을 발한다. 도면상의 계획과 실제 현장에 도착한 나무의 수형이나 질감이 다를 때, 그는 즉각적으로 나무의 표정을 읽어낸다. 굵고 무게감 있는 짙은 나무를 앞쪽에 세우고, 선이 가늘고 잎이 여린 나무를 뒤편에 배치하여 좁은 공간 안에서도 원근법을 통한 극적인 깊이감을 창조해 낸다. 30평 남짓한 좁은 마당조차 그의 손길을 거치면 숲의 일부처럼 아득하고 웅장한 깊이를 품게 되는 이유다.
“튼튼하고 사려 깊은 뼈대를 먼저 빚어낸 뒤에야 비로소 식물이라는 생명을 얹을 수 있는 것입니다.”
— 이주은
클라이언트와의 소통 방식에서도 공간을 대하는 그의 흔들림 없는 철학이 묻어난다. 무작정 클라이언트의 예산에만 공간을 욱여넣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전문가로서 항상 최상의 결과물인 A안과 현실적인 대안인 B안을 함께 제시한다.
“비용을 줄여야 한다면, 땅의 뼈대인 배수나 포장 공사를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크기를 줄이거나 추후에 직접 심을 수 있는 초화류의 비중을 조절하는 쪽으로 제안합니다. 왜 이 디자인이 이 공간에 가장 적합한지, 공간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훌륭한 정원은 결국 서로를 향한 진정성 있는 소통과 전문가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가 무르익어 갈 즈음, 그는 수많은 유튜브 채널과 미디어가 정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담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공사 전후의 자극적인 ‘비포 앤 애프터’나 단 한 번의 방문으로 끝나는 일회성 리뷰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원의 진짜 아름다움은 ‘시간’에 있습니다. 봄의 설렘, 여름의 무성함, 가을의 깊이, 겨울의 적막함 속에서 공간이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 그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정원이 왜 이런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지 공간에 대한 심도 있는 해석이 더해질 때, 대중들도 정원의 진정한 가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긴 대화의 끝, 자신만의 정원 조성을 꿈꾸며 주저하고 있는 수많은 예비 정원주들을 향해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부탁했다. 부드럽고 차분하던 그의 눈빛에 순간, 단단한 힘이 실렸다.
“저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이주은, 공간이오 대표
더 이상의 덧붙임은 필요 없었다. 모진 겨울의 시간과 생명이 자라나는 인고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본 사람, 그리고 공간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묵묵히 탐구해 온 디자이너만이 지닐 수 있는 담백하고도 묵직한 약속이었다. 이주은 작가가 짓는 정원이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삶을 더 깊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유가, 바로 그 짧고 강렬한 한마디 속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정원은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함께 돌보는 사람들 곁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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